이 글에는 지난 1년간의 소식들과 그동안의 모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으며 제 인생 두번째 간증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저를 도와주셨던 라이즈업 무브먼트 선교단체와 제가 절망과 싸울때 굳건히 붙들어준 구동찬 형님과 유진우 형님, 그리고 의리에 사내 정성민 형님께 돌립니다.
'2013년 6월 그 후'
-chapter 1-1 : 갑작스런 군 입대의 배경
-chapter 2 : 부사관 학교 입학
작년 2013년 6월 10일 경에 제가 선교단체 뿐만 아니라 모든 지인들에게 아무런 인사 없이 돌연 군에 입대를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사조차 드릴 수 없었던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 물리적인 힘으로 저희 가정을 있는 힘껏 내려친것만 같은 일들이 마구 터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머니의 건강과 집안 형편은 더 이상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할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에 돈이 너무나도 필요 했었고 당시에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로는 감당을 못해내는 상황들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을까 여러 방법을 모색하던중에 친척동생으로부터 부사관이라는 자리를 소개받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부사관으로서 복무를 할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선교단체에서 생활하며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였고 그때문인지 저는 사역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사역자'라는 의미를 좁게 생각하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오해를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가족구성원이 대상이 되어 그들을 먹이고 살리기 위한 사역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사관의 월급, 환경 등등 조건들을 살펴본 저는 무조건 부사관이라는 자리에 들어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고, 하나님께 우리 가족이 먹고 살길은 이 부사관이라는 자리밖에 없다며 기도하며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사관 시험을 완전히 말아먹다못해 씹어먹게 되었고 합격 가능성이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에 '아 아직은 아니구나' 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 원래대로 토요기도회를 찬양팀으로서 섬기고 다시 사역에 집중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부사관이라는 자리를 사실상 포기한체(나로서는 시험 난이도가 굉장히 높았다) 두달여 시간이 지났을까 토요일날 기도회를 섬기던 중 뜻밖의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동시에 안그래도 망하기 직전인 저희의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동생의 교통사고 소식이었습니다. 머리가 함몰 되어 뇌막이 찢어지는 심각한 교통사고였습니다. 그 사고의 소식을 듣게 된 어머니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건강은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위독해지셨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중환자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군 입대 날짜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마음이 힘들었고 많은 지인들이 저를 위로해주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 주위의 중보기도들과 간절함때문인지 하나님은 동생에게 기적을 배풀어 주셨고 단 6일만에 모든 부위가 낫게 되었습니다.
결국 단 한명에게도 연락을 드리지 못한체 새벽에 집에 잠깐 들러 어머니께 3개월만 집을 비우면 된다며, 3개월만 기다리면 모든게 해결 될거라며 어머니를 위로해주었고 반듯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뒤로 한체 저는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끊어져 있고, 천식이 있는 저로서는 훈련을 잘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만큼 기적이 많이 따랐습니다. 훈련받다 육군 병사가 사망한 사건이 터졌고 그 뒤로 모든 훈련의 강도가 낮아졌습니다. 100km를 걸어야 되는 행군을 25km만 했고 1주일 유격 훈련 해야 될것을 3일만 하는 둥, 전체적인 난이도과 확 낮아져 무사히 훈련을 치뤄 낼 수 있었습니다.
3개월의 훈련기간 동안 제가 속해있던 1소대 60명 전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훈련 당시에 기수(깃발 드는 사람)였는데 동기 후보생들은 저를 기수그리스도로 불러주었습니다.
그래도 훈련은 훈련이었기에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힘들때마다 예수님과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저는 우리 가정을 지켜달라며 하나님께 틈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모님의 편지를 받는 동기생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마침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어머니께 편지가 왔습니다. 그냥 편지일 뿐인데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습니다. 여전히 동생은 말썽이라는 소식과 어머니 몸이 점점 더 이상해져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도 힘내라는 내용과 자랑스럽다는 내용, 보고싶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버텨냈습니다. 그리고 늘 내 자신에게 최면 걸고 바래왔던것처럼 임관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임관 전 저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됬습니다.
"어이구 윤형아 몇일날 임관식 하니"
"음 9월 4일쯤"
"거기 어떻게 가는지 좀 말해줘라"
"에이 엄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오지마
끝나고 내가 성남 갈게"
"그러지 말고 얼른 말해봐"
"응 야탑 종합버스 터미널에서..."
임관식에는 어머니와 저의 지인 유진우 형님이 와주셨습니다. 유진우 형님께서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와준 것입니다. 어머니는 동생도 왔으면 하나님이 더 좋아했을텐데..라며 아쉬워했지만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많이 부어계셨습니다. 심장의 상태가 더 안좋아지신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쓰다듬어주셨고 기특해하셨습니다. 저도 앞으로가 기대 됬고 그 날은 제 인생 최고로 굉장히 기쁜 날이었습니다!
chapter 2 : 부사관 학교 입학
이젠 핸드폰도 맘껏 쓸 수 있었고 그토록 원하던 어머니와 연락도 가능해졌고 지인들에게도 드디어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지인들과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교회에서 우연히 전대장님(대령)을 뵙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새벽기도를 권유하셨지만 저는 나가고 싶어도 아침 점호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 대답했는데 아침 점호를 없에 줄 태니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새벽기도도 가게 되고 저의 이 기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것이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추석 이틀 전 제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 추석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들은 다 가족들 만나러 올라가지만 저는 이곳에 남아서 기도를 더 진지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기도 열심히 하고 밥 아구처럼 먹으라며 응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 인생 80년밖에 안되는데 더 못드려서 죄송하다며 너무 충만했었습니다. 부사관 학교의 교관님들은 저를 위해 특별히 숙소도 잡아주셨습니다.
chapter 2 : 신호
추석 전날이 되었습니다. 동기들은 모두 가족들을 만나러 갔고 저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배정받은 숙소로 짐들을 가지고 갔고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위치가 가까운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찾아 나섰고 15분 거리에 교회가 있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번 추석기간이 너무 기대 됬습니다. 교회를 찾아가서 평소 기도하던 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고 나오던 길에 슈퍼에 들려 간식거리를 샀습니다.
어느덧 제법 날이 깜깜해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추석때문인지 친척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바로 저에게 부사관을 소개해준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이었지만 빠른이라 서로 반말을 합니다. 그정도로 또 친합니다.
"어 윤국아! 무슨 일이야?"
"야야야야야 너 어디야?"
"나 진주지 이번 추석때 계속 여기 있을거야"
"야 너 소식 못 들었어?"
"응? 무슨 소식?"
"너네 어머니 돌아가셨데"
".."
"여보세요?"
"뭐라고"
"아 빨리 올라와"
"아 장난 치지 말고"
"야 진짜야 아 얼른 올라오라고!"
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있었습니다. 다리가 풀려 길바닥에 철푸덕 엎어졌습니다. 믿기지 않아서 올라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네 흐르는 눈물이 얼른 올라가라고 부추기는 듯 했습니다. 곧 교관님께 전화를 걸었고 교관님은 저를 버스터미널까지 대려다 주셨습니다. 정말 다행이도 딱 맞는 타이밍에 딱 한 자리가 남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탔습니다. 진주에서 성남까지는 4시간 30분이 걸립니다.
머리는 멍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동생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형 나 엄마 시신 봤어 형 나 너무 슬퍼"
"...야.. 계좌번호 불러 돈 보내줄테니까 이걸로 먹을거 먹고
형 지금 가고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
유일한 나의 지인 닿는 정성민 형님과 유진우 형님과 구동찬 형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 중 정성민 형님은 어떻게 알고 맨 먼저 병원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지금 영광이 나랑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는데 집중해"
"어.. 형.. 알았어..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영안실로 갔고 저는 거기서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 통화했었는데 믿을 수 없었습니다.
-chapter 3 : 자대생활
엄마가 남겨주신 유산은 동생이 사고친것을 허무는데 모두 사라졌고, 친구들은 저를 떠나갔습니다. 낯선땅에 홀로 던져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잘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근 하고서는 빈 집을 찾아서 몰래 들어가 자야했고 이불이 없어 맨 바닥에서 자고 다시 일어나서 출근하며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끄심을 받고 당당하게 들어왔는데 펼쳐지는 상황들에서 하나님께 굉장히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좌절해본적이 없었고 절망에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또 다시 사고를 쳐서 감옥에 들어갔고 동생이 사고친것을 제가 물어주지 않는 이상 법적인 공판을 받아야 했기때문에 두려움에 어머니의 유산을 모두 동생의 벌금을 갚는데 사용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동생의 방황은 더 심해질뿐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유산을 사용했다는 그 선택은 한동안 저를 굉장히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저에게 표현조차 할수 없는 큰 환란이었고 그 여파는 많이 사라졌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제 일어나는 일들은 클래스가 달랐습니다. 정신적인 한계를 이미 넘어선 극한의 상황이 주어지니 그동안 포장되있던 제 본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도 안나갔습니다. 도데체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레 이런 엄벌을 주시는것일까. 내게 기적을 배푸시고 부사관에 들여보낸 존재가 하나님인데 이건 도데체 뭔 상황인가 싶었고 하나님이 싫어졌고 괜한 반항이 나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선교단체에서 배웠던 것들이 실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이었고 은혜란 없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믿었습니다. 믿어야만 했고 다른 길은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기때문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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