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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일기장) 흑역사../1층 (2012~2015)

엘리야

by 글쓴이, 갈렙 2015. 5. 30.

참고 서적 - (말4:1-6) (왕상17:1) (사무엘서)

참고 사이트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23597&cid=50762&categoryId=50770


반갑다. 이번주에 가족끼리 예배 드릴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짧게라도 드리자는 말씀에 성경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읊어주신 말씀은 엘리야의 관한내용이었는데, 그 짧은 대목이 굉장한 떨림을 주었다. 


가족 예배 후에 바로 인도로 사업상의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출장 내내 나의 마음속엔 엘리야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렇게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인도 땅은 바알의 권능(바알- 풍요의 신)이 쎈곳이었다. 곳곳에 창녀촌이었는데 근처 여자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했는지 내게 외쳐댔다. "기모치~ 기모치~"  "주여.."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른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온 세상의 시스템이 하나님을 없다고 했을때이며 여호와의 이름이 땅에 실추된 그 때다. 하나님이 선민이라고 예정한 이스라엘 조차도 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꿇은 그 때다.


자,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한가지 일러줄것은 이 세상이 아무리 발전하고 변한다 해도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아세라-퀘락, 욕망의 신)가 핵심이라는것이다. 이번 전시회 다녀온 나라가 바로 그 대표적인 나라다. '파타야'같은 경우는 굉장히 음란했다. 온 호텔, 음식점, 모든곳에 실제로 아세라 신상이 가득했다. 또 인도는 거짓말 굉장히 잘 했다.


1. 출장중에 계속 하나님께 던졌던 질문

우상을 이기는 비법은 '사랑의 인쳐짐'이다. 인도에 도착하기 전,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짧게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불렀던 찬양이 '내 맘에 인을 치소서'였다. 온 피부에 전율이 돋을정도로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멈출수 없는 감동이 마음을 점령했다. '너 어마어마하게 우상이 가득한곳에 가는데 내가 너의 심장에 사랑으로 인을 치고 있어. 넌 내거야. 어떤 세상 권세도 천사도 너와 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어.' 충만함 속에서 인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어떤 크리스챤을 만났는데 그분은 한참 사업에 관해 얘기 하던도중 갑자기 매춘부와 잔 얘기를 무용담 늘어놓듯 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크리스챤이라곤 믿을수 없을정도의 내용이었다. 그분은 분명 돈은 많이 벌고 있으나, 어느세 그를 위로해주는거라곤 하나님과 가족이 아닌 '돈으로 산 자기 딸과 같은 나이의 매춘부'가 되어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쳐져 있지 않은자가 돈을 벌거나 성공을 하게 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 생긴다. 그리고 충격적인것은 이게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열심히 사는것을 추구하는데 열심히 사는 에너지 자체도 까놓고 말해서 바알의 힘으로 하는경우가 많다. 똑같이 사역하고 똑같이 공부하고 일할수 있는데 누군 그 심장의 에너지의 근원자체가 '나'이다. 하지만 이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사랑의 인쳐짐'에서 시작된 행위는 성공을 넘어서는 특권을 누리게 해준다는것이 되겠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껏 나를 버탱겨준 근원인 자아의 심장을 뽑아내고 하나님의 심장으로 교체하는것, 그것이 바로 '인쳐짐' 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인쳐짐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것을 말이다.


'엘리야의 영은 도데체 무엇입니까?' 샤워하면서도, 옷을 입으면서도, 전시회하면서도 하나님께 엘리야의 영에 대해 계속 물어봤다. 그 끝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감동을 주신것은 엘리야는 '마지막때의 비밀'이라는 것이었다.


엘리야의 핵심은 '권능'이다. 엘리야는 당대의 사회 모두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그 시스탬을 주관하는 왕 이세베에게 가서 떠들어대기를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였다.


한낮 판자촌 노인내가 왕을 흔든것이다. 이 엄청난 무개념의 주인공 엘리야는 대단한 권능의 사역을 펼쳐낸 사람이었다. 정말 놀라운것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실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도데체 무엇을 뜻하길래. 



2. 엘리야

요즘 세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666, 베리칩. 등등의 소문들이 많은데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길 우리는 땅굴에 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교회를 해야하고, 금을 사야하고, 집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둥의 반응들이 대게 그러한데, 무조건 틀렸다고 할순 없지만 온전치 못한 자세라는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인을 밟을것이라 하셨고 하나님이 정한날에 악인들은 너희의 발바닥의 재와 같을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말라기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점점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대적한다. 동성애. 진화론 막 이런 세대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자. 마지막때에 하나님이 보낼 엘리야같은 사람을 선택하시는데 바로 사랑으로 인쳐지는것으로 시작한다.


성경에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의 스펙을 쭉 기록해놨는데 예를 들면 '나는 레위의 자손이니,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중에 몇번째...'이런형식으로 말이다. 근데 엘리야를 소개하는 단어는 딱 두개, '길르앗에' '우거하는자.' 말곤 없었다. 그는 학벌도 없고 스펙도 없고 혈통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memo)

*길르앗 : 깡촌

*우거하다 : 얹혀살고 떠돌아 산다.


하나님께선 엘리야를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권능을 선포하게 될것이고, 그 선포에 하나님께서 탁월함을 부으실텐데 그 통로가 스펙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다. 엘리야는 스펙이 전혀 없는 자였음에도 이스라엘에서 선지자가 누구냐 질문하면 모두가 엘리야라고 대답할정도의 선지자였다. 



3. 우리가 이제부터 대적해야 할 진짜 적, '이분법적 사고'

인생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고 끝이 아니다. 예수님 열심히 사랑하게 해놓고 교회에 머무르게 하는것은 건전하지 못한 신앙의 자세이다. 하지만 이게 현재 교회가 내놓은 방안이다. 이것이 현재 교회가 할수 있는 사역의 특화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무조건 사역자의 길로 걸어가야한다는 제한적인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만물을 충만케하는 '충만함'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의 정세가 다 사탄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것을 깨트린 분이 예수시고, 예수의 신부가 우리이며, 신부는 신랑과 하나이고, 예수는 이 땅의 주인이시다. 그분을 사랑하는 모두가 이 땅의 주인이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으며 우리에겐 마땅히 받은 땅에 대하여 통치하고 다스릴 권리가 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스로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가득찬 욥의 가족이 죽어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 마침내 욥은 주님과 영접하게 된다. 그때 듣게 되는것이 너를 꾸짖어라. 너는 내가 천지창조했을때 뭐했냐. 너는 사실 나와 창조하는 창조할자야. 너의 정체성은 너는 만물을 통치하는 자야. 라는것이었다.


세상이 여호와를 무시할때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은 하나님의 엄청난 엘리야의 부르심이 있다는거다. 우리의 싸움은 골리앗과의 싸움이 아니다. 거인이 물멧돌 하나로 그렇게 쉽게 쓰러질수 있겠는가. 골리앗이 쓰러졌던 이유는 다윗의 대적이 결코 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골리앗의 현상은 부풀어진 풍선같은것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러하듯 골리앗역시 한낮 피조물에 불과한, 불면 날아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탄또한 우리의 대적이 아님을 크리스챤은 알아야 한다. 그도 지음받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하였던, 사울이 겁먹고 다윗이 대적하였던 진짜 대적은 누구라는 것인가. 다름아닌 대적이라 함은 내 안에 있는 견고하게 자리잡은 '이분법적 사고'이다. 우리 속에 대적이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해결할 수 있었던것은 다윗안에 있던 대적이 해결됬기 때문이다.


현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골리앗이 대적이라고 하며, 세상의 문화를 대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된지 얼마 안된 자들에겐 좋은 가르침일수 있겠으나 더 성숙한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앞으로의 인생에 적용되어질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들이 말하길 세상은 더럽고 교회는 거룩하며 세상것을 버리고 교회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인데, 교회에 머물기만 하면 편립한 기독교가 생긴다. 짠맛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골수 기독교인이 되는거다.



-1 이분법적 사고의 첫번째 핵심, '거룩함의 기준'

이번주에 직원한명을 야단쳤다. 업무시간에는 업무를 해야하는데 회사에서 말씀을 보는것이었다. 나도 크리스챤이니 한편으로는 이해할수 있지만 도데체 언제부터 말씀 보는것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여겨왔었는지 궁금했다. 일하는것보다 말씀 읽는게 거룩한것이라고 언제부터 여겨왔냐는 것이다. 우린 언젠가부터 신앙에 경계를 지어버렸다. 이건 옳고, 이건 틀리다는 선악의 판단기준이 있는것이다. 


우리는 그리스적 사고를 버려야 하며, 무엇보다 우리의 행실을 하나님 앞에 정당화 시키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크리스챤이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헌신이 아닌 다른것에 집중하는것이 거룩하지 않은것이라고 여겨버리는 도데체가 이상한 사상, 이것이 무너져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제일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병에 걸렸을때 의사 말을 믿는가, 예수님 말씀을 믿는가. 어느 순간 내 삶이 신앙이 아니라 과학을 붙들어 매버린다.

(memo)*과학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것이기에 과학을 '붙든다'라고 표현하기보단 '이용한다'라고 표현하는것이 좋다.  


어찌됬건 내 근본 뿌리를 보면 이분법적 사고가 딱 자리잡고 있다는것이다. 때로 하나님이 하나의 가치에 불과하고 눈으로 증명된 과학적인것이 더 진짜 같다고 여기는 그런류의 사상이 우리 안에 있다. 이건 사회의 스트럼 속에서 초중고 때부터 교육을 받은것이다.



-2 이분법적 사고의 두번째 핵심, '사울주의' 

'사울주의'란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때 보암직한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왕을 정할때의 일화이다.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자신들보다 한뼘 더 크고 잘생기고 늠름한 사울임을 보고 모두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곳곳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소리와 박수소리가 즐비할정도로 말이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좋아할때 정작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애통해 하였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의 외모를 보나 나는 마음의 중심을 본다.' 겉모습을 보고 왕을 판단하고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그래서 골리앗이 나타났을때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겁냈던 것이다. 사울의 외모를 보고 추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보다 더 크고 쎈 외모를 가진 골리앗이 나타나니까 그렇게 겁을 먹었던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과 골리앗이 대립하였던 때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적은 최전방에 있는 골리앗과 블레셋의 군사들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맡형인 엘리압이다. 전쟁터에서 엘리압이 다윗에게 뭐라고 했는가. 어린 다윗에게 분노한다. 너 이따식! 여기 왜 나왔어! 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냐! 내가 너의 교만함과 완악함을 아노니 이 쪼그만놈이! 저 블레셋 봐라. 이게 무슨 전쟁놀이인줄 아냐! 애들은 가라! 


사울은 다윗에게 뭐라고 했는가. 다윗아, 너의 비전은 인정할게. 하지만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야. 넌 목수의 아들이잖아. 너 길르앗의 우거하는 자잖아. 넌 어리잖아. 너 고졸이잖아. 

(memo)

*3반장님께서 내게 "넌 비전은 풍부한데 스펙을 더 쌓아야되" 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유일하게 기적을 행하지 못한곳이 태어난곳이었다. 근데 다윗과 예수님과 엘리야의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맡형과 사울의 시점과 완전히 달랐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다윗은 이미 사울주의를 깨버린 자였다. 사울주의를 깬 다윗에게 엘리야의 시선이 있었던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뭐라 말했는가. 내 양들을 지킬때 내가 이리 수염을 때려 잡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보기에 다윗의 주장은 웃기는 간증밖에 안됬다. 고작 짐승 몇마리 죽인거가지고 자신이 용사라니 기가 찬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보란듯이 이겨제꼈지 않았는가? 뒤에 언급하겠지만 작은 간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행해가지고 조금이라도 무찌른 경험이 있는가. 다윗이 사울에게 어필했던것이 바로 지난날의 작은 간증들이었다. 그들이 볼때 하찮은것에 불과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적을 무찔렀던 경험을 결코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작은 경험이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이 용사라고 얘기할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한것이라곤 하프친것뿐이다. 예배드린것뿐이다. 경건의 능력으로 사울에게 대답하는거였다. 단순 무식 반복. 우리 또한 경건의 능력으로 답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스펙을 쌓으면 얼마나 잘 쌓을수 있겠는가. 내가 좀더 보암직 하고, 있어보여야 되는것. 그래야 하나님이 쓰실거같고, 그렇게 노력하는것이 나쁜건 아니지만 중심이 거기 있다면, 언젠가 나보다 조건 있는 사람 나타났을때, 도망가게 된다. 이분법이 문제인것이다.


마귀는 이미 떨어진자다. 이미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어두움은 빛이 됫고 내가 겪어야 할 고난과 절망은 예수님께서 다 졌다. 모든것이 해결됬거늘, 근데 왜 나에겐 빛이 없냐. 답은 하나다. 태어날때부터 생성된 아주 견고한 진이 내 안에 있기때문이다. 


이분법적인 문제는 바로 '자아'와 연계된다. 여전히 내가 조금더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상받고 못하면 벌받을거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폐해'이다.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는 얼마나 잘해야 되고 얼마나 더 거룩해야 될까. 



-3 이분법적 사고의 세번째 핵심, '오래된 페러다임'

이 땅의 주인은 우리 하나님이시거늘, 인간들은 자꾸 이상한 신들이 이 땅에 주인이라고 한다. 억울하지 않는가? 엘리야의 스피릿이 바로 억울함이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고 아세라에게 입맞추지 않는자. 백성들이 눈에 보암직한것으로 사울을 볼때부터 하나님은 다윗을 준비하셨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말한다. 오케이, 너 출전하는거 인정해줄게 대신 내 갑온 투구 검 들고가. 바로 이게 오래된 패러다임이라는것이다. 이미 사울을 비롯한 모든 어른들의 싸우는 방식은 칼과 방패로만 싸워야 되는거야.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사역자의 길을 추천하는것, 그게 하늘의 상금이 많다라고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기성세대의 페러다임이고, 그런식으론 킹덤이 임할수 없다. 우리에겐 다윗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울의 갑옷과 투구를 들고 가지 않고 물멧돌 하나 들고가는 야성이 길러져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일화를 보고 사람들은 물멧돌을 잘 써서 이겼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그 일화를 인용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길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꾸준히 하나만 연습하여 열매를 맺으십시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십시오. 라고 한다. 


하지만 되돌아볼것은 정말 골리앗을 물리쳤던게 돌맹이때문이었던가. 자꾸 사람들은 성경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자꾸 돌맹이를 잘 던졌기 때문이었다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페러다임에 껴맞추고 싶어한다. 다윗이 정말 이스라엘에서 제일 물맷돌을 잘 던지는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은 정말 돌 잘 던지는 훌륭한 어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쓰셨는가. 기존 교회의 성도들을 비꼬는게 아니다. 그냥 진지하게 바라보니 이렇다는 것이다.


우리 문제의 근본은 자꾸 이분법적 사고로 '그래도 잘 던졌기때문에'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어린 다윗에게 물멧돌 던지는 법 누가 가르쳤겠는가. 옛말에 형만한 아우 없다고 보나마나 형이나 누가 가르쳤을 것이다. 양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맷돌은 잘 썻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물맷돌이랑 상관 없는 얘기이다. 근데 사람들은 왜 물멧돌에 대해 얘기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물멧돌이 전쟁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꾸 '무엇을 하는거' 이런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물맷돌을 집어도 상관없고 풀집어도 상관없고 신고있던 쓰레빠를 던져도 상관 없다는 이런 태도가 인으로서 쳐져야 한다.


우리습성자체가 온통 답을 찾고 싶어해서 행위와 연관지으려고 하는데 물맷돌이었기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는건 틀린것이다. 오래된 관습과 제도를 이겨야 하고 이길수 있는 힘은 

여호와의 이름이 밟히고 있는 현 상황에 애통함이 있는지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되지 못하는 그 분노가 승전의 비밀이다. 


(사무엘서)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하나만 가지고 나온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할것이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스펙, 이분법적, 사울주의)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들어내고 싶어하셨다는 것이다. 바로왕의 출애굽사건 이전에는 인류에게 여호와란사실 듣보잡 신에 불과 했다. 인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그리 큰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 재밌는것이 성경에 보면 출애굽사건 당시에 하나님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일부로 완학하게 하셨다는건데,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높다는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모든 재앙의 끝에는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것이다.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땅에서 왕에게 행할것이나 바로가 너희 말을 듣지 않을것인즉' 라는 식으로 무려 10번동안 말이다. 왜?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려서 내 군대, 곧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땅에서 인도하여낼지라.'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손을 애굽위에 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땅에서 인도하여낼 때에야 자신이 진짜 창조주라는 공식이 성립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엔 엄청나게 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그거보다 더 쎈게 나 여호와라는것을 '알리고' 싶어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도하여낼 때에야 애굽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은 왜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치 이기적인 모습처럼 보여질수 있는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이름의 가치를 이렇게나 짓굿게 알리고 싶어 하시는가. 그 의도는 딱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거에 대한 가슴 아픔이 있으시다. 왜냐면 하나님은 온땅의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싶으신것이다.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왜 주인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야 하는가. 왜 하나님이 아닌 딴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것인가.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복음으로밖에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복음을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자 얼마나 감동스럽습니까. 열심히 헌신하고 사역해야 되요." 밖으로 표현해낼줄 모른다. 교회를 욕하는게 아니라 더 깊은 복음의 특출성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크리스챤들에겐 영접을 뛰어넘는 성숙된 발전이 필요하다. 


4. 정리

엘리야가 길르앗에 우거하면서 엘리야가 뭐했겟는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심장에 사랑으로 인쳐졌다. 바알과 아세라가 온땅을 통치하는 지금의 시기는 노아의 떄보다 더 심각하며 소돔과 고모라때가 더 견디기 쉬울 정도이다.


사람들이 다 배도하는 그때가 우리의 미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해놓으시기를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군대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하셨다. 세대주의나 영지주의 기타 사이비적인 모든 종교들이 마지막 시대라는 개념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처는 피신하라고 밖에 말을 못한다. 


그들과 우린 다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더 강한 빛의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것이라는게 오늘 설교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높임 받지 못한것에 대한 애통함.. 엘리야의 대적은 길르앗에 우거할때 이미 다 무너졌었다. 다윗의 대적은 이미 양때를 다룰때 무너졌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느냐vs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느냐.


다윗도 믿음이 약했다. 전투가 조약돌 하나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돌맹이 다섯개를 들었다. 우리에게도 조약돌이 있을것이지만, 조약돌로 싸움이 진행되어지진 않을 것이다.



ps.

너는 전에 이미 나를 본적이 있는 자이며,

너가 나의 길을 준비했고,

나의 아들을 준비했던 자가 바로 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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